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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서옹스님

서옹 큰스님 생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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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0-08-19 19:24 조회1,7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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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 스님 회상에서 2 하안거를 성만하신 서응 스님은 선의 실수 못지 않게 선 이론의 체계적 연구가 겸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일본 선학의 명문인 교토의 임제대학으로 유학을 떠나셨다.

이때가스님의 나이 28세인 1939년 이었다.


서옹스님은 임제대학 재학중 선철학의 셰계적 권위자인 히사마쓰 신이찌 박사(久松眞一,당시 경도대학 교수)를 만나 마음과 대화를 통하는 도반이 되어 깊은 학문적 교류를 나누셨다.

2년간의 대학생활을 마칠 때에는 ‘진실자기(眞實 3 己)’ 라는 졸업 논문으로 당시 일본 불교학계 를 주름잡던 니시타 기타로,다나베 하지메 등 교토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들의 학설을 비판,일본 불 

교학계에 큰 화제를몰고 왔다. 실참(實參)을 겸하여 지성을 갖춘선지식으로 평가받은 스님의 졸업 논문은 후에 일본 여러 대학에서 교재로 쓰이게 되었다.


대학을 마친 서옹 스님은 일본 임제종 총본산인 묘심사에서 제대로 선수행올 해보고자 마음먹었다. 혹독하기로 유명한 임제종 선원 입방식을 불과 이틀만에 통과하고 참선수행에 있어서도 일대 

조사의 풍모를 보이자 일본인들은 서응 스님을 부처님처럼 여기며 여불(如佛)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서옹 스님은 묘심사 선원에서 3년 안거를 성만하셨다.


임제대학 공부와 묘심사 선수행을 마치시고 고국으로 돌아오니 1944년,서응 스님 나이 33세가 되었다. 서옹 스님께서는 수행납자의 본분사를 지켜 귀국 후에도 더욱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 

셨다. 백양사에 잠시 머물다 전국 각처의 사찰을 돌아다니 며 공부와 수행에 전념하셨다. 1949년 목포 정혜원에 주석하신 것을 비롯,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는 부산 선암사 선원에서 향곡, 자운,석 

암,홍경 스님들과 함께 안거에 들어 정진하셨다. 1954년에는 해인사선원, 1956년에는 백양사 선원에서 안거에 들었고 스승 만암 스님께서 서옹 스님에게 전법게를 남기어 법을 이으신 후 입적하신 

1957년에도 깅원도 정암사선원에서 하안거,해인사 선원에서 동안거를 성만하시며 수행 납자로서 경향각지에 그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맑고 청정한수행을 계속해온 서응 스님은 1962년 대흥사주지를 맡으셨다. 곧 이어 동국대학교 대학선원장 겸 조실을 맡아 높은 학덕으로 불법 의 오의를 밝히고 후학을 양성하는데도 선구자의 역할을 다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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