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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서옹스님

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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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2-18 07:27 조회1,7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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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신을 맑게 하는
서옹 큰스님 법문집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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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17.

●의식과 무의식을 초월한 자리●


사람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는
감각과 욕망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으며
또한 이 욕망의 흐름에 따라 우리는 살고 있다.

감각과 욕망이 없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자기중심적임과 동시에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에
사람을 사악하게 만든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불안에 허덕이게 된다.
욕망에 시달리게 되면
인간은 자기의 올바른 정신을 상실하게 되고,
그것의 노예가 되어서
참 자유도 없고 책임감도 없고,
질서도 없고, 폭력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흔히 현대를 이성적으로 살고
이성을 각성한 시대라고는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폭력이 난무하는 것은
개방된 욕망으로 살기 때문이다.

또한 질서를 지키고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며,
또한 학문을 연구하는 것이
바로 이성적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과 같은
과학문명을 창조해 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 인간은
구경적(究竟的)으로 잘 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안에서
‘착하다. 악하다, 참이다. 거짓이다’
이러한 대립분열을 가져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불안하고
결국에는 절대절망과 불안,
그리고 절대모순에 스스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감각 위에 이성을 개발해서 살지만
그것만으로는 원만하게 잘 살 수 없다.

인간의 근본바탕에는
부처님 같은 마음,
그리고 부처님을 사랑하는
종교심(宗敎心)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어려운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항상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야 하며
사람과 사람이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어떤 일을 행하던,
걸리지 아니하고
자유자재하게 잘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근본 바탕에 있는 부처 마음,
이것을 개발해서 살면
사람은 스스로 훌륭하게 살 수 있다.

사람이 과학문명을 이룩한 동기에는
‘대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자,
대 자연의 법칙을
연구해서 우리 인간이 이용하자’
는 잘못된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그러한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연의 법칙을 연구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과학문명을 이룩한 것이 틀림없다.

인간의 욕망이
자연의 법칙을 역행하게 된 동기이다.
즉, 우리의 욕망이 과학문명과 이성을
이용하고 지배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격자란
본디, 부처 마음자리의 작용으로
감각과 욕망을 조절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오늘날의 과학문명은
거꾸로 인간의 욕망이
과학기술과 이성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은
스스로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급급하고 있다.
이를 뉘우치고 자성하지 않으면
어쩌면 세상은 자멸로 가게 될 지도 모른다.

이성의 전당이라고 하는 대학교가
진실한 이성을 개발하는 전당이 아니라
욕망을 달성하는 기술적 이성을 습득하고
지식을 배우는 학교로 전략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졸업하면 얼마나 돈을 벌 수 있느냐?
얼마나 취직을 잘할 수 있느냐?
얼마나 권력을 잡을 수 있느냐?
이러한 목적으로 우리는 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학교에서 많은 학문을 배우지만
결국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학문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기술적 이성은
오늘날 인간의 이성을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은 산업시대, 즉 산업사회이다.
이 또한 인간 욕망의 부산물이다.
욕망으로만 살려고 하니까
서로를 해치게 되고 타락하게 되고
인심이 험악해지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살다 보면
스스로 파멸을 부르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올바른 삶을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부처 마음자리가 앉아서
인간의 이성을 지배하고 감각을 지배해야 한다.

이렇듯이 우리는
부처 마음자리의 작용으로
원만한 인격을 가꾸는 한편,
부처 마음자리의 바탕 위에서
과학문명을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

또한 자신이 부처이기 때문에,
그 부처 마음자리를 통해
일체 인류가 부처님같이
서로가 서로를 존경해야 하며
항상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오늘날 인류는 타락하고
심각한 위기에 스스로 빠져 있다.

이러한 현실의 위기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불법뿐이다.
부처님은 생사의 해탈을 위해 출가하여
십이인연(十二因緣)을
역관(逆觀)하고 순관(順觀)해서
생사의 근본이 되는 무명을 깨치고
그 무명을
타파해 초월하여 깊은 도를 깨쳤다고 했다.

부처님은 무명(無明), 행(行), 식(識)
이와 같은 순서로 깨달음을 얻었는데,
이는 의식과 현행의식이 나타나기 이전에
무명, 행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즉 식이 있기 이전의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무명은 요즘 말로 하면 잠재의식을 말하며
행은 인간이 잠재한 능력과
잠재한 형성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잠재의식은
의식이 나타나기 이전이며 바로 무의식을 말한다.

요즈음 심리학에는
여러 사람의 잠재의식을
‘집합적 무의식’이라고도 하는데
이 무명이라는 것은
모든 중생의 공통되는 잠재의식이다.

무명이 집합적 무의식이라고 한다면,
부처님은
이 집합적 무의식을 타파하고 초월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조사선(祖師禪)도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간화선(看話禪)에서는
처음 화두가 의심 한 덩이가 되고,
이 의심이 간단없이 지속해서 무의식이 되고
의식이 끊어진 자리에서 뒤집어져 가지고서
견성(見性)한다고 한다.

조사선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무의식을 통과하고
타파해서 견성한다는 것과
부처님이 무명을 타파했다는 것은
똑같은 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법은
이 조사(祖師) 스님 말씀으로 보아야 옳은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을 초월한 자리,
자기 참모습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만
진정한 불법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의식적으로 이를 풀이하면
결코 옳은 불법이라 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과 조사 스님의 말씀과 행동을
겉으로만 보면
우리의 감각세계나 이성세계와 똑같다고
오해할 수 있지만,
조사 스님의 말과 행동은
의식과 무의식을 초월한 그 본래면목 자리,
인간의 참모습 자리에서
참으로 걸림 없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는 대개 보통사람은
이성적인 분별심을 가지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조주 스님 회상에서
대중공양이 베풀어졌을 때
그 방에 여러 훌륭한 스님이 쭉앉아 계셨다.

그런데 한 노파가 들어와서
여러 스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 대중 스님들은 엄마가 낳았다”

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조주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큰 애기는 오역불효(五逆不孝)다.
부모도 죽이고 부처도 죽이고 나한도 죽인
그러한 오역죄 불효야”

조주 스님과 같이 훌륭한 스님을 보고
오역불효라고 하는 것은
우리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고
또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게 큰 법문인 것이다.

그건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 차원 높은 인간의 참모습에서
그 자리를 그대로 표현한 훌륭한 말이지.

이것을 보통사람의 차원에서 비판하면
잘못된 것이다.

조주 선사가

눈을 부릅뜨고 보니
노파는 나가 버렸다.


이처럼 선이라는 것은
설명하면 틀려 버리고,
지해(知解)로 풀이해도 틀려 버린다.


그래서 내가 여기에 착어를 하겠다.

종사(宗師)가 중생을 불쌍히 여겨
검은 것과 흰 것을 밝혔으니
북녘땅 황하수가 철저하게 혼탁하도다.

宗師憫物明緇素
北地黃河微底運

그러면 또한 필경에 어떠한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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