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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서옹스님

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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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2-14 07:06 조회1,6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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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신을 맑게 하는
서옹 큰스님 법문집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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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14.

모두 다 내 손바닥 안에 있도다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

사람은 쉽게 말해서 살아있는 생명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삶에 대해 깊이 자각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산다는 자각이 있으면
그 삶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며
반대로 생존에 위험을 느낄 때는
그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사람은
소극적으로 생명체를 보존할 때에는
그저 살아갈 뿐이지만
적극적으로 살 때에는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해 갈 수 있다.

이와 달리 하등동물은
생존하기 위해서 생존할 따름이다.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지
그밖에 다른 뜻은 없다.

삶을 영위하는 것은
오직 산다는 것 이외에는
삶에 대한 가치나 목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도 의식주의 문제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동양에서도 예로부터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다”
라고 하였다.

즉,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항심(恒心)도 없다는 뜻이다.

이렇듯이
정치를 할 때에도
국민들을 풍족하게 먹고 살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먹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공자도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먹을 것을 족하게 하고,
군대를 족하게 하며,
백성으로 하여금 믿게 한다
(足食足兵 民信之矣)”
는 세 가지를 말했던 적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보아도
의식주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정치하는 사람으로서,
지도자로서 백성을 생각할 때에는
의식(衣食)을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만약 그렇지 않을 때에는
나라가 어지럽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가치 있는 인간의 길]

현대는 산업사회다.
오늘날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도
얼마나 풍족하게 살아가느냐에 있다.

그래서 더 풍족한 삶을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 심지어 살생까지 한다.

이러한 악한 행위를 개인이 할 경우에는
그래도 법률로 제재할 수 있지만
국가가할 경우에는
오히려 공공연하게 지나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와 같이 물질을 위주로 살아갈 경우에는
서로 빼앗고 침략하고 죽이기까지 하는데
나라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나라에 충성을 하는 것이다”라고 까지 한다.

심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인간들은 하등동물과 같이 살고 있다.
이는 전 인류가
파멸의 지름길로 가고 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어떻게 이런 세상에
우리는 편안하게 생을 누릴 수 있겠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아, 죽고 싶다.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하는 말을 자주 한다.

물론 가치 있고 뜻 있는 일에
몸을 희생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원래부터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는 그 자체에
분명한 뜻을 가지고 살고 있다.

즉 삶에 대한
가치와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옛 성인들이 말씀하시길

“뜻 있는 선비(어진 사람)는
생을 구하려고 어진 것을 해침이 없다.
몸을 죽여서 오히려 어진 것을 이룬다

(仁者無求生而害仁 有殺新而成仁)”
고 하지 않았던가?

뜻 있는 사람이나 어진 사람은
인을 해치며 살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몸을 버리고 자기 생명을 희생하더라도
어진 것을 구하는 것을 참된 생명으로 안다.

어느 성자는

“죽는 것이 오히려 사는 것이며,
어진 것을 해치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인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군자는 도를 꾀하고 의식을 꾀하지 않는다
(君子謨道 不謨食)”
고 하지 않았던가?

또 “군자는 도를 걱정하고
가난한 것은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이라면
옳은 인간의 도를 밟아야지,
인간의 도를 버리고
짐승과 다름없이 살아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의(義)를 생각하라]

다시 말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기를 바라지만,
아무리 비렁뱅이일지라도
짐승을 대하듯이 대하면
음식을 주어도 먹지 않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이것이 바로 짐승과 다른 점이다.

짐승은
먹이를 탓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잘 먹는다.

그래서

“군자는 의(義)를 분명하게 깨닫지만
소인은 이익에만 밝으니,
이익을 얻음에 있어 의를 생각하라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見利思義)”
고 했던 것이다.

이 말은
이익을 아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의리 있게 재산을 모아야지,
의리를 버리고
재산을 모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군자는

“의롭지 아니하게
부자가 되거나 귀하게 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뜬구름과 같다.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고 했다.

서양철학에서도 인간에게는
이성, 실천이성, 행동하는 이성이
분명히 갖추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칸트에 의하면
이성이란 반드시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지
다른 조건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렇듯이 참다운 사람은
옳은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며,
또한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다른 조건을 붙여 행하지 않는다.
즉, 다른 것을 바라고 행하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인간의 실천이성과 양심, 규범의식 등은
참으로 인간만이 가지고 고상한 것이다.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하는 데에
그 가치가 있고 사람다움이 있는 것이며
이와 반대로
어떤 일을 함에 있어 다른 무엇을 요구한다면
결코 올바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양심적 생명이란
바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인간’을 뜻한다.
바꾸어 말하면
도덕적 생명, 참다운 인간의 생명
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이러한 마음이
새 역사를 창조하므로
역사적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인간의 목적은
하등동물과 마찬가지로 오래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죽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인간만이 가지는
생리적 생명관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현대과학이나 의학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이는 어쩔 수 없다.


[절대적 이율배반]

옳은 일과 의로운 일,
착한 일을 하는 정신적 생명은
우리의 양심이 강할수록 죄를 느끼게 한다.

양심적으로 착한 일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절대적으로
착한 일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참모습이다.

착한 일에는 반드시 악이 따른다.
쉽게 말해서
부모한테 효도하는 것은
‘자연적 인간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효도하려고 노력하지만
참으로 효성이 깊은 사람일수록,
또 양심이 있는 사람일수록
불효를 더욱 크게 느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신적 생명은
착한 것에 반드시 악한 것이 따르므로
착하다고 할 수가 없고,
옳은 것에 반드시 그른 것이 따르므로
옳다고 할 수가 없으며,
참에는 늘 거짓이 따르므로
참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있는 그대로 깊이 비판하면
인간은 참으로 ‘죄악덩어리’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살생하지 마라’, ‘죽이지 마라’고 했다.
다른 종교에서는
‘사람을죽이지 마라’는 말은 있어도
‘생물을 죽이지 마라’는 말은 없는데
이것이 바로 불교의 특색이다.

과학문명이 발달할수록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종교가
대단히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첫째로 생명을 죽이지 말라고 하지만,
생명을 죽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만은 분명하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면
우리는 숨을 쉬면서
셀 수 없는 균을 죽이고 있지 않는가.

또한 물 한 방울을 먹기 위해
소독을 해
몇 억 마리의 균을 죽이고 있지 않는가.

이렇게 우리는
살생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본래 청정한 자기 참모습]

또한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한다.
자기 것이 아닌 물건은 쓰지 말라는 뜻이다.
하지만 어디에 자기 물건이 있는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른 사람,
즉 천지. 인류. 국가. 사회의
덕택으로 이룬 것이지
자기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니다.
그러니
여러 사람의 피와 땀으로 만든 물건을
어찌 자기 소유라고 하겠는가,

어쩌면
내가 가진 모든 것도
공공의 소유인지 모른다.

불교에서는
‘무소유’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는 세상 어느 것도
자기 소유가 없다고 하는 말과 같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재산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쓰고 있다.
그것은 도둑질이 아닌가.
물론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은 써야 하겠지만

우리는 그 이상을
자기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따지고 본다면
우리 인간은 결코 죄악을 면할 수 없다.
아니 양심이 있을수록
죄악은 면할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현실인 줄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은 따지고 보면
고통 덩어리이고
죄업(罪業)의 덩어리이며
죽음을 면할 수도 없으며
모든 것이 거짓투성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세간이 전부 거짓이다,
죄업 덩어리다, 모든 게 다 고통 덩어리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이야말로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말한 것이며
이 때문에 오늘날
허무주의가 범람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이 허무주의, 죄악 덩어리를 극복하고 초월하여
우리 인간의 근본 밑바닥에는
생사가 없는, 죄악이 없는
본래 청정한 자기 참모습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죄악 덩어리인 인간이 죽어서
본래 자유자재한
참모습으로 되살아나는 것이
불법(佛法)이며,
또한 올바른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참사람이며
본래면목, 참다운 인간상, 참다운 실존이다.

그러면
생리적 생명, 정신적 생명, 종교적 생명,
인간을 초월한 참 자기와 생명과
의 관계는 어떠할까?


[종교적 생명으로 살자]

우리가 허무한 인간을 극복하고 초월해
자기 밑바닥에 있는 참다운 인간이 되면
종교적 생명, 인간을 초월한 참사람,
참 본래면목이 비로소 작용하게 된다.

이 차원 안에서 우리는
먹고 자고 하는 생리적 생명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종교적 생명을 산다고 해서
결코 생리적 생명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또한 도덕적 생명, 정신적 생명을
무시하는 것도 더더구나 안 된다.

종교측 생명 안에서
생리적으로 자유자재하게
정신적 가치를 누리는 것이
올바른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정말 차원 높은 ‘정신적 생명’과
‘생리적 생명’을 누릴 수 있게된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도인은
생리적 생명, 정신적 생명을 느끼지 아니하고
고목(枯木)과 같이 아무 생각이 없고
바위 덩어리와 같이 무심경계에 있다’고 한다.

이는 결코 틀린 말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또한 도인이 되면
윤리도덕에도 걸림 없이
자유자재하게 행동한다는 생각도 옳지 않다.

차원 높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생리적으로 살아야
보다 올바른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잘못된 국가 통치 속에서 살고 있다.
투쟁철학이 모든 것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옛 성인은

‘법령으로써 인도하고
형벌로써 다스린다면
백성들은
법률이나 형벌만을 면할 줄 알았지
수치스러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덕망으로써 인도하고
예법으로써 다스린다면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될 뿐만 아니라
올바르게 고쳐 나갈 것이다

(道之以政 制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制之以德 有恥且格)’
라고 말한 것을
정치가는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즉 정신적 생명으로 세계를 건설해야
인류가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하물며
우리의 정신적 생명이
초월한 종교적 생명으로 나아가
과학문명을 창조한다면
인류는 진실한 행복을 누리는 세계를,
저절로 건설하게 될 것은 당연하다.


[파초(芭蕉)의 주장자]

파초혜청(芭蕉慧淸) 스님의
법문에 대해서 얘기하겠다.

선(禪)은 종교적인 생명체라고도 할 수 있고,
종교를 초월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참으로
자유자재한 종교가 참선이라고 하겠다.

중국에는 5종
(위앙종. 임제종. 조동종. 법안종. 운문종)
의 종파가 있다.

그중에서 위앙종의 교조가 위산앙산 스님이다.
파초혜청 스님은
앙산 스님의 손자뻘이 되는데
파초혜청 스님은
선종의 전통을 이은 중국에서도
존경을 받는 훌륭한 도인이다.

이 분이 바로 우리 신라 사람이다.

이렇듯 우리나라 스님은
중국선종의 역사와 불교의 역사에도 많이 나온다.

일본 사람들도 중국에 가서 불법을 배워 오고,
또한 중국 사람도
일본으로 많이 건너 갔던 때다.

그렇지만 일본사람은
중국의 역사책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 민족성은 대단히 훌륭하다는 말이다.

중국에서 혜청 스님이 법문한 것 중에
‘너에게 주장자가 있으면
너한테 주장자를 주고,
너에게 주장자가 없으면
너에게 주장자를 빼앗아 버리겠노라’
하였던 것이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주장자가 없으면 주장자를 주고,
주장자가 있으면 빼앗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혜청 스님은 이와 반대로
“주장자가 있으면 주장자를 주고,
주장자가 없으면 주장자를 빼앗는다”
고 했다.
이게 어떤 도리이겠는가?

이 법문에 대해서
일본사람들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모두 틀리게 말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무문 스님께서 평을 했다.

무문 스님은 남송(南宋) 때 사람으로
중국의 무문혜개(無門慧開)를 말하는데
그는 남송 효종 10년에 태어나
출가한 후 소주 평강 만수사
명교사관(明敎師觀) 선사에게서 참선을 배웠다.

그래서 ‘무(無)’자 화두가 있는 것이다.



 한번은 그 무문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이렇게 물었던 적이 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자 조주 스님이
“없다”
고 대답했다.

무문 스님을 그 말씀에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조주 스님은 왜 없다 하십니까?”
라고 되물었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무문 스님은 홀로
이 ‘무’자 화두를 의심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6년을
여법히 용맹정진을 해도
결코 ‘무’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문 스님이 잠을 자지 않고 참선하다 보니
자꾸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 잠을 깨기 위해
낭하 위를 걸어 다니면서 참선을 했다.
그래도 잠이 오면
머리를 기둥에 박으면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양하라고 북을 치는 소리를 듣고
무문 스님은 ‘무’에 대한 화두를 깨쳤던 것이다.

한 번 가만히 생각해보라.
‘무’를 어떻게 깨쳤는가를.

그리고 나중에 무문 스님은
자기가 깨친 경지를 시로 지었다.

“푸른 구름도 없는 대낮 한 우레 소리에
대지의 모든 중생들의 만눈이 활짝 열렸도다.
모든 만물이 다 머리를 숙이고
수미산이 펄떡펄떡 뛰어서 삼대에서 춤을 추도다.”

다음 날 명교 스님한테
자신이 깨친 경지를 글로 보였는데
명교 스님은
“네가 귀신을 보았구나”
라고 말하고
위엄을 떨치며

 ‘할’ 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무문 스님도 ‘할’ 을 하였다.

또 명교 스님이 ‘할’ 을 하자
역시 무문 스님도 ‘할’ 을 하였다.

‘무’를 깨친 것이
이와 같이 분명하게 자유자재한 경지를
무문 스님은 전했던 것이다.




무문 스님이 거기에 송(頌)을 했다.

내가 이 지팡이를 붙들고 의지하여
다리가 끊어진 물을 건너고
그 지팡이를 짝하여
달이 없는 마을로 돌아가도다.

만약 그렇다고 주장자라고 부른다면
지옥에 들어가기를 화살과 같이 하느니라.


우리가 참선을 하면
이러한 경지를 환히 알게 된다.
내가 설명을 많이 했는데,
참선은
설명을 하면 오히려 틀린 것이다.
올바로 참선을 하는 사람은
설명을 하지 않는 것이 도리다.

그런데 거기에
무문 스님이 송(頌)을 했던 것이다.

모든 지방에 깊고 얕은 것이
모두 다 내 손바닥 안에 있다.

하늘을 버티고 땅을 버티니
곳을 따라서 종풍을 떨치도다.


그런데 이것을 해설하면
첨선공부에 비상독약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착어(着語)를 붙이겠다.

한바탕 부는 새벽바람
연못 위로 스쳐오니
가을연꽃 물결에 흔들려
분홍 옷을 벗는 도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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