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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서옹스님

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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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2-13 10:01 조회1,6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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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신을 맑게 하는
서옹 큰스님 법문집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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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13.

그대들은 어지러히 할(喝)을 하지 말라


때는 이제
입동을 훨씬 지나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다.

시정(市井)과 가정에서는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분주한 때이기도 하다.
오늘날은
눈부신 컴퓨터 발전으로 인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정보에 따라
개인과 기업의 성패가 좌우될 만큼
빠른 정보전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한
제1차 정보혁명은 언어능력의 획득이며,
제2차는 문자의 발명,
제3차는 인쇄의 발명,
제4차는
전보.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의 발명이며,
컴퓨터의발명은 제5차 정보혁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혁명이
인간 생활에
일대 전환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뒷면에는
인간의 삶을 점진적으로도 크게 변화시켰다.

그 결과 지금까지
사회질서를 유지해 왔던 기존의 전통이
퇴락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보공해 등 각종 위해(危害)가
크게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부처님 경전에 이런 말씀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고행(苦行)하시던
히말라야 산 밑의 큰 숲에
많은 새들이 살았는데
바람이 불자,
나무와 나무가 마찰이 되어 큰 불이 나고 말았다.

갑자기 숲이 불길에 맹렬하게 타오르자
모든 새들은
날아서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갔는데
오직 한 마리의 앵무새만 그곳에 남아 있었다.

그 앵무새는 먼 바닷가로 날아가
자신의 날개에 물을 적셔 와서 불을 껐다.
다른 동물들은 불길을 피해 도망갔지만
그 앵무새만은 자신의 몸을 희생했다.”

바야흐로 세계는 지금
불이 활활 타고 있는 숲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인류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존립(存立)의 위기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거대한 역사의 한 줄기 흐름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평화와 행복추구는 당연한 과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으로
이러한 대혼란을 막아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 역사 창조를
항시 받침해 준 것은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인류를 위기에서 건져낼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종교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해 온 종교는
시대에 따라,
혹은 시대의 이해를 좌우하는 가치관에 따라서
많은 변화를 거쳐 왔다.

그렇다면 과거 어떠한 종교철학이
시대의 중심이 되어 왔으며,
과연 어떤 종교가 인류의 장래에
평화와 행복을 약속했는지를 알아보자.

그 동안의 종교철학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인간중심주의 종교철학이며
둘째는 신(神)중심주의 종교철학이다.
셋째는 인간과 신을 초월해서
다시 인간을 긍정하는 종교철학이다.

다시 설명하자면,
인간중심주의 종교철학은
근세의 종교철학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서양의 중세기는
신, 즉 절대자인 하느님 중심의 시대였다.

그러나 절대적인 신의 권위로
인간이 자유를 상실하고 노예화되자,
이에 도전한

일대의 전환기가 있었으니,
이때가 바로 르네상스다.

르네상스는
14세기 말부터 16세기 초에 걸쳐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이탈리아에서 일어나
전 유럽에 파급된 문화혁신 운동이다.

이 운동은
개인의 해방, 자연인(自然人)의 발견을
주안으로 함과 동시에
그리스. 로마의 고전문화를 부흥시키고
나아가 학문. 정치. 종교 방면에도
청신한 기운(氣運)을 일으켜
신(神)중심의 중세문화에서
인간중심의 근대문화로 전환하는 계기를 이루었다.

즉 인간 내면에는 한량없는 능력이 있으니
인간성을 자각하고 권리를 회복하여
인간이 역사의 중심이 되자는 운동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신중심의 역사에서
인간중심의 역사로 바뀌었을 뿐이지
신은 여전히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초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
하느님이나 신도 인간과 같은 차원이다.
도리어 인간이 신을 지배한다’는 철학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인간주의적인 측면에서
신을 조명한 대표적인 철학자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등을 지은
독일의 철학자 칸트였다.

그는
‘인간에게는 도덕적 실천이성이 있어서
도덕이 존재하려면
그 바탕에 신(神)이 필요하다’
며 신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덕의 실천 입장에서 신이 필요했으므로
신을 내세운 것이지
결코 신의 입장에서 신을 긍정했던 것은 아니다.

칸트의 인간중심주의적 종교철학은
헤겔에 이르러
소위 독일관념론을 형성시키고
다시 신칸트학파에 계승되어
19세기 말에 이르러
철학사상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요,
현실적인 것은 반드시 이성적’
이라고 하여
범신론적인 주장을 내세웠던 헤겔은
정(正). 반(反). 합(合)의 변증법을 통해
‘예술과 종교 그리고 철학은
정. 반. 합의 마지막 단계이며 출발점이기도 한
절대적인 정신의 자기표현’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런데 이러한 제반 사상은
절대적인 정신이 물질로 귀환한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제시한
마르크스에 이르러 신을 거부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제자였으니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이 중심이 되는 종교철학과
대립되는 신(神)중심주의 종교철학이 발생했다.

여기서의 신(神)은
칸트적 이성의 입장에서 주지하는
인간과 통하는 ‘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것을 주관하여 지배하고
인간의 차원에서는 도저히 이를 수가 없는,
인간과는 철저히 단절되어 있는 신을 말한다.

또한 인간이 신 앞에서
이성을 절대 부정함으로써 발생하는 신의 경지,
즉 신과
다리가 놓여질 수 있는 그러한 입장을 뜻한다.

참이다. 거짓이다, 옳다. 그르다,
선이다. 악이다 등을
분별하는 인간의 이성은
도저히
절대적인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이성’이다.

이러한 사상을
위기신학 혹은 변증법적 신학이라고 하는데
‘비합리적’이라는 말은
합리적인 차원에 못 미친다는 뜻의 ‘비합리’와
합리적인 것을
초월한다는 뜻의 ‘비합리’를 말한다.

또한 위기신학에서 말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이성을
초월한다는 뜻에서의 비합리를 뜻한다.

이렇듯 우리는
인간 밖에서 존재하는,
인간과 단절되어 있는
절대자 하느님으로 한정해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떠한가?

그러한 주의(主義)에 입각한다면
신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지배하므로
전지전능한 절대자 앞에서
인간은 피조물이 되고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것은 너무도 뻔 한 일이다.

인간은
타율적으로 절대자에게 의지해야 한다.
결국 인간은 자유를 상실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리에서 떳떳하게 살 수 없게 된다.

이렇듯이 일각에서는 불교를 가리켜
‘미신이다, 우상숭배다’라고 하는데
도대체 우상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서 단절되어 존재하는 절대자’
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우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절대자인 신(神)을 주장하고
신을 한정하는 종교야말로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로
전락하게 될 것은 분명하다.

이 두 가지 종교 철학 외에는
인간과 신을 초월해서
다시 인간을 긍정하는 종교 철학이 있다.

보통의 인간은
선과 악, 참과 거짓, 삶과 죽음의
대립관계로 인해서
서로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는 절대모순에 빠지게 되는 근본 이유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허망한 것이 삶의 모습니다.

이 허망함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절대모순, 절대적인 이율배반,
그리고 죽음에 대해
절대적인 긴장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절대 무의식 상태에 임하게 되는데
이때가 가장 순수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의식과 무의식은 대립되어 있다.
절대의 경지란
순수한 의식 상태에서 그치지 않고
절대 이율배반이 되어 나아가게 되는데,
의식이 끊어진
무의식의 경지에 이르는 때를 말한다.

이때 정신과 마음은 청정한 경지에 임하게 되어
마침내 무의식까지 타파하고 초월해지는 것이다.

이때야말로
비로소 ‘산은 산이고 물은물’이 되어,
청정해서 한 물건도 없는 절대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구경의 본래면목에 임하게 되면
다시 주체적으로 절대 이율배반이 되어
맹진하게 되면 돈연견성(頓然見性)을 이루게 된다.

이 견성한 본래면목에서
절대 이율배반이 해체되어
절대통일이 되는 것이며
본래면목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가장 명확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자리는 가치. 반가치, 이성. 반이성,
시간. 공간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초월적인 신불(神佛)도 초월한
근원적인 주체로서 무애자재(無碍自在)하게 된다.

마침내 여기에서 근원적인 주체의 작용으로
시간. 공간과 감성. 이성이
다시 되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다른 종교나 철학도 어느 경지에 이르기는 한다.
그러나 그 경지는
동양의 노자나 장자, 서양의 신비철학과 같이
단지 무의식의 경지에까지만 들어갔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 의심할 수 없는 명확한 경지냐’
하고 구경까지 파고 들어 갈 때에는
신(神)도 초월하여
어디에도 한정할 수 없는
자유자재한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선(禪)이며
이것이 무신론(無神論)이라 하겠다.

선은 인간을 근원적으로 해결한다.

선이야말로
어떠한 복잡함에도
끄달리지 아니하여 자유자재하고,
아무런 형상도 없는
심지어 부처와 하느님도 초월한 세계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리인 것이다.

동양에서 내려오는
이 진리가 바로 불법이고 선이다.
이 불법과 선만이
암흑 속의 불꽃에 둘러싸여 있는
인류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불교라는 훌륭한 보배를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지켜오고 있다는 것에
긍지를 가져야 할 것이며,
깨침의 그 자리에
도달할 수 있도록 정진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선(禪)법문을 들려주겠다.



 

흥화(興化) 선사가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듣건대
앞마루에서도 ‘할’을 하고
뒷마루에서도 ‘할’을 하는데
그대들은 어지러이 ‘할’을 하지 말라.

설사 흥화(興化)를 ‘할’해서
삼십삼천(三十三天)에 오르게 하고
다시 떨어져 내려와서
한 점의 호흡도 없게 하여도
다시 깨어난 뒤에
그에게 향하여 말하되 ‘아니다’ 하나니라.

무슨 까닭인가,
흥화가 일찍이 붉은 비단 장막 안에서
진주를 뿌리지 아니했도다.

그대들과 허공 속에서
어지러이 ‘할’을 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운문(雲門)스님이 송(頌)하기를

대중에게
마갈타의 법령[摩竭令]을 완전히 제창하니
어찌 두 입술을 닫고 열음이리요.

할(喝)! 소리 아래에
눈먼 나귀가 떼를 지어 달리고
꿈속에서
다섯 수미산을 밀어 쓰러뜨리도다.


내가 여기에 대하여 착어(着語)하겠다.

돌을 부딪쳐서 나는 불빛 속에서

승부를 가리니
무쇠말[鐵馬]을 거꾸로 타고

수미산을 오르도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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