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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서옹스님

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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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2-12 09:34 조회1,7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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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신을 맑게 하는
서옹 큰스님 법문집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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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12.

반은 그대를 사모하고
반은 그대를 원망하도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그 ‘나’는 ‘참나’가 아니요, ‘거짓 나’이다.
아주 고통스럽고
허망하고 미혹하고 깜깜한 ‘나’이다.
그런데 그 ‘거짓 나’의 근원에는
아무 걸림이 없고 죽음도 없고, 고통도 없고
밝고 밝으며 자유자재한 ‘참나’가 있다.

우리는 잃어버린 ‘참나’를 되찾아서
자유롭게, 자주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일제의 압박을 받다가 해방이 된 뒤
외국의 문명을
너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체성을 가지고
외국문명을 들여왔다면
무조건 외국 것이 좋은 줄로만 알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로부터 내려온 우리 것도
좋은 것이 있으면 잘 살리고,
외국 것이라도 비판해서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이 있으면 잘 취해서 발전시켜야
주체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맹목적으로 외국 문물을 들여오는 것은
주체성이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우리도 정신이 많이 깨어,
지금은 외국문물에 대해
좋은것과 나쁜 것을 가릴 줄 알며,
우리 전통의 좋은 점을 인정하고
더욱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성을 하고 있다.

이 점은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된다.

우리 불교의 가르침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거짓 나’를 버리고
‘참나’, 자기 본래면목을 알아야 하는 데에 있다.

이 ‘참나’, 우리의 근본마음,
이 자리는 허공과 같다고
옛 조사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 있다.

허공이란 것은
끝이 없고 아무 걸림이 없이 텅비어 있으면서
삼라만상이 그 가운데 갖춰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참나’,
우리 근본마음을 알고
‘참나’답게, ‘참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욕심이나 거짓된 마음을 가져서는 아니 된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불법을 믿는 사람은
자기를 내던져 버리고
여러 사람을 위하여 살아야 하며
‘자기’란 것, ‘거짓 나’란 것을 버리고
여러 사람을 위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지금 우리는 오욕에 끌려 다니면서
자기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헛되이 인생을 산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진정한 보람을 찾기도 어려우며
또한 참다운 자기 정신을 가지고 살 수 없다.

우리는 재물을 잃거나
명예가 조금이라도 손상되면
어쩔 줄을 모르고 괴로워하면서도
‘참나’를 잃어버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살고 있다.

우리 인간에겐
재물도 귀중하고 명예도 귀중하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가 죽는다면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재물과 명예도,
그리고 권력도 소용없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참나’를 잃어버리고,
깜깜한 마음으로
‘거짓 나’를 ‘참나’로 생각하고
여러 가지 욕망에 끌려 헤매는 사람은
자기 정신을 잃고 사는 미친 사람과 꼭 같다.

그러하니 우리는 제정신을 차려서
‘참나’를 깨달아 참으로 밝고 맑은 그 자리,
허공에서 사지를 움직이듯
자유자재하게
초(超)자주적(自主的)으로
살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한국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우리 민족이 가장 잘 단합된 때가
바로 불교가 융성했을 때임을 알 수 있다.

불법이야말로
모든 인간과 우주의 근원을 이루는
보편적인 바탕원리로
여러 가지 개체라든가 특수한 현상들이
여럿이 아닌 하나임을 밝혀 주고 있다.

이렇듯이 불교는
‘하나하는 바탕에서 자유자재하게 사는 종교’
이기 때문에
불교를 믿을 때
‘모든 것을 통합하고 화합시킴으로써
민족이 혼연일체가 되어 단합하게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민족이
평화스럽고 세계 인류가 행복하게 살자면
불법이 다시 왕성하게 일어나야만 가능하다.

그러면 이제부터
선(禪)에 대해서 얘기할까 한다.

불교에는 여러 종파가 있는데
우리 한국에도 18개 종파가 있다.

가령, 팔만대장경 가운데 [법화경]이
부처님의 경지를 가장 바르게 전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세워진 종파가 있고,
또 [화엄경]이
그렇다고 생각해서 세워진 종파도 있다.

이와 같이 종파마다 의지하는 경전이 있다.

그런데
선종(禪宗)은 의지하는 경전이 없다.
선종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근본자리를
그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듣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깨닫고 생활하는 불교이지
경전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즉 문자를 쓰지 않고 다만 교(敎)만 따로 전한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대장경을
교(敎) 안이라고 할 때,
교(敎) 밖이라는 것은
팔만대장경 밖에 있는 진리를 말하는데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즉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서
그 마음의 성품을 보는 것이
성불이고 부처를 이룬 것이지
따로 부처가 없는 것이 바로 선종이다.

이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 이야말로
선종의 근본표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선종을 잘못 알고 있다.

가령,
불립문자에서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문자를 부정하고
팔만대장경도 부정해 버리는 것이
선의 깊은 경지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禪)은 전혀 그렇지 않다.

요사이 서양 철학도 선에 많이 가까워져 있다.

물론 서양 철학의 본래 전통은 이성철학을 말하며,
이성이란
참이다, 거짓이다, 착하다, 악하다,
아름답다, 추하다를 분별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성적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서양철학의 전통이라 하겠는데,
이성철학 그 밑바닥에는
사유하는 사람의 정신과
정신의 대상이 되는 물질이 있다고 한다.

곧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二元論)인데,
여기에서
정신은 주인이며 물질은 하인이라고 본다.
이 바탕에는
무엇인가를 지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

정복한다, 지배한다는 것은 바로 욕망인데,
이때부터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육체’
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욕망철학이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19세기 말부터는
욕망철학이 인류를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인간의 겉 부분에 불과할 뿐,
깊이 들어가 보면 진정한 실존이 있다.

실존주의적 존재론을 수립한 하이데거는
전쟁을 통해 죽음에 대한 경험을 많이 했는데,
그는
‘인생에는 죽음이 있다.
죽음은 피할 길이 없는데,
그 죽음과 맞서 죽음을 숙지하는 데에
인간다운 주체성과 실존이 있는 것이다’
라고 하여
이성과 감성보다도
주체적 존재로서의 실존을
중시 여김으로써
인생을 더 깊이 관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도
선(禪)에서는 참선하는 첫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참선이라는 것은
‘생사모순에 빠져 한 덩이가 되어
의심해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결국에는
의식이 끊어진 ‘무의식 상태’가 된다.
이것을 초월하여
생사가 없는 자기 참모습을 발견하고,
인간의 올바른 실존과 구경의 실존에서
적극적으로 자유자재하게 살 수 있는
이런 영원의 생명체를 해결하는 것이 선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이성철학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이었지만
선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자유자재하게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원리바탕이다.

그래서 의식과 무의식을 초월한
인간의 본래면목을
완전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의식 또한
주관적으로 뭉쳐서 된 것이다.

대개 우리는 색안경을 쓰고 현실을 보고 있다.
사람들은 현실을 확실한 사실이라고 믿고 있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모두 환상과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주관이 뭉쳐져서 현실의식으로 된 것이다.

또 무의식도 의식이 숨어 있는 것이므로
역시 주관이 뭉쳐서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식과 무의식을 타파해서
완전히 주관이 없는
본래 자기의 참모습 자리에 가야
환각이 아니라 참으로
진실한 자기의 본래모습이 되는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다운 인간상에서는
말하는 것도 참다움이며,
생각하는 것도 참다운 것이며,
그래야만 참모습의 자격을 갖게 된다.

말하자면
이성과 감성을 초월한 자기 참모습 자리에서
다시 참모습 작용으로,
다시 이성으로 작용하고
감성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참모습 자리, 높은 차원에서는
문자가 바로 참모습의작용과 표현이므로
얼마든지 문자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볼 때
다른 종파보다도 선종계통에
문자로 된 어록이
더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문자를
얼마든지 자유자재하게
높은 경지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불립문자’ 인 것이다.

불립문자라고 해서
문자를 아예 못 쓴다고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이성적, 감성적인 문자는 못 쓴다는 것이다.

이성과 감각, 감성을 초월한
자기본래면목, 참다운 인간상,
그 차원에서 문자를 사용하고
그런 초차원적인 경지에서 문자를 사용해야
그것이 옳은 문자지
이성, 감성, 보통 말하는 의식, 알음알이, 지혜로
문자를 사용하면
진리와는 거리가 멀고 틀리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우리 본래면목 인간상과도 틀리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불립문자의 뜻은
바로 이런 의미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쉽게 말해서
올바른 문자를 사용하자는 것이지
문자를 쓰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더욱이 우리는
낮은 의식과 모자란 지혜로
또한 알음알이 식으로
팔만대장경을 연구하기 때문에
자유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팔만대장경의 노예가 되어
올바른 불법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알음알이를 초월하고,
또한 그 의식을 초월해서
자기 참모습 자리에서 팔만대장경을 보면
그것은 쉽게 말하는 교(敎)가 아니며
교외별전에 대한 교(敎) 안도 아니며
바로 선지(禪指)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는 바로 조사의 종지이다.

그 자리에서 보면
팔만대장경만
부처님과 조사의 종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말하는 말소리가
전부 부처님의 종지이고
조사 스님의 종지인 것이다.

이때에는
물소리나 바람소리, 새소리 모두가
선의 종지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자기의 참모습 자리에도 못 가고,
결국 의식에 떨어지고 분별에 떨어지면
팔만대장경은 고사하고
조사 스님의 어록까지도
참 법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분별망상이 되고마는 것이다.

결국 거룩한 어록도
잠꼬대 소리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는 것은
그러한 경지나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지
‘무식해야 된다’는 게 결코 아니다.

참으로 교외별전,
팔만대장경 밖을 전했다고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교(敎) 안이요,
팔만대장경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선에서 깨달은 경지는
인간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자리 참모습인 것이다.

선이라 하여
이상한 사람이 이상한 장소에서
이상한 모습으로 이상하게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한 번 나서
자기 참모습을
올바로 알고 깨닫는 것이 참선이지
절대로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처는 자기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참선도 자기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자기가 진실하게 사는 거기에
참선이 있고 부처님이 있는 것이지
자기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직지인심 견성성북’이라
자기마음, 사람마음, 근본마음 그 자리가
바로 부처지 따로 성불은 없다.

그러므로 그 마음자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
누구든 평등할 뿐만 아니라,
그 자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허공과 같이 하나라는 점이다.

모든 사람과 자연
그리고 횡으로 사람과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가 되는
아주 깊이 있는 평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가 되어버리므로
대자대비한 마음이
저절로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하나가 되고,
우주가 하나라는 바탕 위에서
서로 부처님처럼 존경하고
자비심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도우며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서양을 지배하고 있는 철학은
‘대립을 투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변증법적 역사관’이라고 하지 않는가.

오늘날은 다 알다시피
전 인류를 한 번에 파멸시킬 수 있는
핵폭탄 같은 무서운 무기를 개발하는 시대이다.

이 지구 전체를 가루로 만들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는 무기를 사용하면
지구위에는 아무것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런데 대립을 투쟁으로 해결하여
역사를 끌고 간다면
그 무서운 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지구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불법의 바탕 위에서
자비와 화합으로
대립을 평화적으로 해결해 나간다면
쉽게 세계 평화는 이루어질 것이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서로 의견이 달라서 대립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데 이 대립을
투쟁으로만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 가정은 결국 화목하지 못하고
파탄이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사랑의 바탕 위에서
대립을 해결해 나간다면
항상 밝고 화목한 가정, 행복한 가정이 될 것이다.

세계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대립은 투쟁으로 역사를 창조한다’는
원리바탕 위에서는
전 인류의 파멸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불법, 자비화합의 바탕 위에서
세계의 모든 어려운 문제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해 나간다면
세계 평화는 이루어질 것이다.

이렇게 개인이나 가정, 집단, 모든 국가가
어떤 문제를
불법(佛法)의 바탕 위에서 해결한다면
평화는 쉽게 찾아오고
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당연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법을 일으켜서 새 역사를 창조해야 하며
인류의 행복에 아바지해야 할 때다.

다시 선(禪)에 대해 얘기하겠다.

선(禪)법문은
의식도 초월한 높은 차원에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禪) 법문은 여러 가지 설명을 하면
의식의 경지에 떨어지고
알음알이의 경지에 떨어지고 만다.
자기의 참모습과는 어긋나 버리게 된다.

선(禪)법문은
의식이 끊어진 자리에서
활발하게 말하는 것이므로
그런 신심을 가지고
마음을 비우고 들어주어야 한다.


옛날에 낭야(瑯琊) 스님이 계셨다.

낭야 스님은
분양(汾陽) 스님의 제자인데
자명(慈明) 등 여러 도반과 같이
분양 스님 회상에서 공부를 했다.

그런데 그곳은 무척 추운 지방이었다.
분양 스님께서는
낭야 스님을 단련시키기 위해
몸에 재를 뿌리고 찬물도 뿌리며
밖으로 나가라고 해도
낭야 스님은 꼼짝하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하여
나중에 임제종 선(禪)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어느 날
장수 스님이 의심이 나서

낭야 스님께 물었다.

“허공과 같이 깨끗한 게 법계라 하는데
어찌 산하대지의 차별이
복잡하게 생겨나 시끄럽습니까?”

그러자 낭야 스님이

“청정본연(淸淨本然)이거늘
어찌하여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겼다고 하는가?”

라고 하시며
큰 소리로 꾸짖으셨다고 한다.

처음의 홀생산하대지(忽生山河大地)와 나
중의 홀생산하대지는 그 내용이 다르다.

즉 처음은
산하대지가 있는 것이 문제였는데,
낭야 스님의 대답에서는
‘어디에 산하대지가 있느냐?’
이 말이다.

이 말 한마디에
장수 스님은 깨달았다고 한다.


거기에
천동각(天童覺) 스님이 송(頌)하기를

“견유불유(見有不有)
번수복수(飜手覆手)로다”

하였다. 즉,



 ‘유를 보고 유가 아니고,
있다고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도 한다’,

‘손을 뒤집고 손을 엎음이로다.
손바닥을 뒤집기도 하고 엎기도 한다’는말이다.




“참으로 산하대지가 어디 있느냐?”
고 호령하는 법문은
석가여래가 팔만대장경을 설한 뒤에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신 법문과
조금도 손색이 없다.

낭야 스님의 경지가
석가모니여래보다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러한 것을 설명하면
알음알이에 떨어지기 쉽다.

의식에 떨어져 의식으로 해결되면
참선과 거리가 멀어진다.


내가 여기에 대하여
착어(着語)를 붙이겠다.

산호로 만든 베개 위에
흐르는 두 줄기 눈물이여

반은 그대를 사모하고
반은 그대를 원망하도다.

珊瑚枕上兩行淚
半是思君半恨君



이것은
옛말로 연시(戀詩)라고 할 수 있고,
요즘 말로는 연애시라고 할 수 있는데,

선에서는 이러한 글을 많이 인용한다.

이러한  연시는

선의 깊은 경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은 이 글을 보고
참선을 하는 사람도
고목이나 찬 바위와 같이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활발히 살아있다고 보는데,
이것은 그런 경지가 아니고
다른 깊은 내용이 감겨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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