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10. > 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스승 서옹스님

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10.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2-09 07:34 조회1,700회 댓글0건

본문

마음과 정신을 맑게 하는
서옹 큰스님 법문집

[사람]
+++++++++++++++++++++++++++

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10.

선(禪)과 노장사상의 차이


중국의 철학과 종교에서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사상은
가장 심오한 사유체계 중의 하나다.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인의 민족성은
현실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고 실용적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발달한 사상은
현실 생활과 직접 관계가 있는
실천적인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즉 윤리. 정치적인 이념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한편,
형이상학적 영원(玄理)을 추구하는
인생관이나 세계관은 별로 수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노자, 장자는
중국인의 상식적인 가치와 사상을 넘어서 세계와
인생의 근본문제를 깊이 다루고 있다.

노자. 장자시대의 중국은
매우 혼란한 전국시대(戰國時代)였다.

전쟁이 잇따르고 권모술수가 넘쳐나던 때였다.
고금의 역사를 볼때
위대한 사상과 종교는
어려운 시대일수록, 고난이 많은 나라일수록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노자와 장자 사상 역시
난세의 위기 속에서 나온 철학이다.

불교가 처음 중국에 전해졌을 때
불교의 이해는
격의(格義)라는 방법으로 행해졌다.

이 격의불교는
기존의 노자, 장자의 사상을 차용해서
불교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가령 노자의『도덕경(道德經)』에 보면
“천하의 모든 만물은 유에서 생하고
유는 무에서 생한다

(天下萬物生於有有生於無 -제40장)”
는 말이 나온다.

삼라만상 역시 모든 형상이 있으므로
유(有)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근본은 무(無)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그것은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을
노자의 무(無)라는 용어로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처음 불전(佛典)을 번역할 때는
불교의 열반(涅槃, nirvana)을
‘무위(無爲)’, 즉 ‘함이 없다,
인위적인 조작이 없다’고 했다.

또 보리(菩提, Bodhi)를
‘도(道)’, 진여(眞如, tathata)를
‘본무(本無)’라고
격의적(格義的)인 번역을 했다.

즉 노자, 장자의 사상을 빌려
불전을 번역하고 불교를 이해한 것이다.

물론 노장철학의 기반을 빌리지 않고는
불교를 처음 수용하기가 어려워서 그랬겠지만
이처럼 불교를
불교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노장철학의 바탕에서 이해했기 때문에
불교의 입장을 올바르게 알지 못했다.

또한 인도의 사상은
명상을 통해
현실의 괴로움을 초월하려 했기 때문에
인식론적 논리가 매우 발달한 반면에
중국은
행동적이고 현실적인 직관(直觀)이 발달했다.

그러므로 중국에서는
심오한 불교를
논리적으로 자꾸 추구해 들어가는 것보다는
직관적으로 체험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사실적인 종교정신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즉 불교의 궁극적인 경지를
어떻게 체험하고 실천하느냐는 문제가
참선과 같은 수행법으로 발전한 것이다.

현재 교계(敎界)의 일부에서는
장자의 좌 망(坐忘),
조ㆍ철(朝 徹), 견 독(見獨)과 같은
직관적인 경지와 선(禪)이
동일한 것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제부터
선과 노장사상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해 보겠다.

『벽암록(碧巖錄)』을 편집한
원오극근(圓悟克勤)선사는
임제 스님의 정맥(正脈)을 이어서
조사선(祖師禪)의 깊은 경지를 보이셨다.

『벽암록』제80칙의
평창(評唱)을 들어서 설명하면
이 평창의 법문은,
그 자리는 우리의 심식(心識)으로 되어 있는데
공부를 깊이 하다보면
모두가 무심(無心)경계가 된다.

무심경계가 되어서
우주 대 자연과 차별이 없는 절대경지에 들어간다.

그러나 참선에서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더 정진을 해서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완전히 타파한
부처님의 반야지(般若智)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부처님의 경지도 타파, 초월하여 자유자재하게 된다.
이것을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라 한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차를 마시고
자유자재하게 되어야
선의 구경(究竟)의 낙처(落處) 인 것이다.

그러면 장자는
무엇이라고 말하였느냐, 이것이 문제다.
『장자』의 「대종사(大宗師)」편에는
좌망(坐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안회가 말했다.
“저는 얻은 바가 있습니다.”

공자가 물었다.
“무슨 말인가?”

안회가 말했다.
“저는 인의(仁義)를 잊어버렸습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됐네. 그러나 아직 부족하네.”

얼마 후 다시 공자를 보고 말했다.
“저는 더욱 얻은 바가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저는예악(禮樂)을 잊어버렸습니다.”,

“됐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하네.”

다시 며칠이 지난 후 또 공자에게 말했다.
“저는 더욱 얻은 바가 있습니다.”

공자가 물었다.
“무슨 말이냐?”

안회가말했다.
“저는 좌망(坐忘)했습니다.”

하니,
공자가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무엇을 좌망이라고 하느냐?”

안회가 대답했다.
“손발이나 몸을 잊어버리고
귀와 눈의 작용을 잊고
형체를 떠나 지(知)를 버리고
도(道)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을 좌망이라고 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도(道)와 하나가 되면
조코 나쁨이 없어지고
화(化)가 도와 하나가 되면
집착이 없어진다.
과연 현명하도다.
나도 이제 너를 쫒아가고 싶구나.”

장자의 좌망이란
의식이 끊어진 자리에 불과하다.

선(禪)은
유심(有心)을 끊어 버리고
무심(無心)마저도 초월하고
부처 경지도 초월한 자유자재한 경지인데,

장자의 좌망은
분별지가 끊어진 무심경계에 그쳐 버린 것이다.

무심경계에서 더 나아가
반야지에 이르러야 하는데
제8식 경지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 경지가 분명히 다른 것이다.

다음에 한 가지 예를 더 들어 설명하겠다.

삼 일 이후에
능히 천하를 초월하고 이미 천하를 밖에 하고,
내가 또 그것을 수지(守之)하며
칠일 이후에는 능히 외물(外物)하며,
구일 이후에는 능히 외생(外生)하고
이미 생을 밖에 한 연후에는
능히 조 철 (朝徹)하고,
조철한 이후에는 능히 견독(見獨)하고
견독한 이후에는 능히 고금(古今)이 없으며
고금이 없는 이후에
능히 불사불생(不死不生)에 들어감이니라.
-『장자』「대종사」

외물(外物),
외생(外生)해서 조 철(朝徹)한다고 했는데,
외생이란
인간의 현실적인 한계를 초월한 것이고,
조 철 이란 말은
인간의 현실적인 한계를
초월한 경지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의식적인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장자의 사상을
선(禪)과 혼동하기 쉽지만 그 차원이 아주 다르다.

장자는 무의식의 경계, 대 자연의 경계,
인간의 인위적인 조작이 없는
제8식의 경계에서 본 것이요,

선은 무심경계를 초월하고
반야지에 이른 것도 초월해서
대자유의입장에 이른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역설한 것은
장자와 선의 다른 점을 비교해서
요점만 말한 것이니.

여러 대중은 더욱 정진해서
분명히 밝혀주기 바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57205 전남 장성군 북하면 백양로 1239   종무소 - Tel : 061-392-7502 / Fax : 061-392-2081

기도접수처 - Tel : 061-392-0100 / Fax : 061-392-1143   템플스테이 - Tel : 061-392-0434

Copyright © 2020 대한불교조계종 백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