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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서옹스님

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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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양사 작성일21-02-07 07:58 조회1,7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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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신을 맑게 하는
서옹 큰스님 법문집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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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옹스님 법문집 [사람] 08.

산은 산대로 부처가 되고
물소리는 법문소리가 되네


험난한 세상에
신심으로 불사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며
중생에게는한량없는 행복감을 주는 일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사람에게는 감각과 욕망이란 것이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스스로 행하여야 할 윤리와 도덕 등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여러 가지 이성이 있기 때문에
사악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감각 과 욕망을 초월해서
훌륭한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항상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사람을 훌륭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성만으로도 사람은
서로간의 대립과 분열, 알력을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의 근본바탕에는
‘언어의 길도 끊어지고
의식과 무의식도 끊어진 자리’를 초월한
부처 마음자리 즉, 영성자리가 있지만
그 자리 또한
이성이 여러 가지 작용을 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 분별심은
바로 부처 마음자리가 작용한 것이다.


또한 감각, 욕망대로만 살면
자신도 타락하고
여러 사람을 헤쳐서 살 수 없게 되지만,
부처 마음자리에서는
욕망도 부처 마음자리의 작용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렇게 이성이나 분별심,욕망이
부처 마음자리에서 작용하면
모든 것이 원만하게 되어서
부처 마음자리의 한량없는 작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 보면
‘만일 어떤 사람이
부처님을 색상이나 형상으로 보거나
혹은 음성으로 보려고 하면
이 사람은 삿된 길을 행하는 것이 되어서
여래를 보지 못한다’ 고 했다.

그러므로 부처자리는
형상도 초월하고
모든 감각도 초월한 자리를 말하는데,
바로 모든 나라, 모든 땅, 모든 시간에 구현해
실현의 형상으로도 나타나고
혹은 모든 행동이 거기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냥 서 있는 고목(枯木)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생각과 형상을 초월하고
무의식까지도 초월한 부처 마음자리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여러 가지를 앞에 두고 분별도 하며,
또한 조화(調和)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 모두가
부처님 마음자리가 작용 되어 버린 까닭이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도
“어떠한 사람이 부처님을 조성하면
한량없는 복을 받고 부처님이 되느니라.”
고 했던 것이다.

이렇듯이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로 부처님 자리이다.

이 때문에
아이들이 모래로 부처님을 만들거나
장난삼아 손가락으로 부처님을 그리기만 해도
또한 한량없는 복을 받고 부처님이 된다고 했으며,

부처님한테 합장을 한다거나,
부처님에게 단 한 번만 머리를 숙이거나
나무불하기만 해도
한량없는 복을 받아서
부처님이 되어 버리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그 이유는
신심으로 부처 마음자리에서
그러한 행동을 하면
비록 조그마한 행동 일지라도
부처 마음자리는 한량(限量)이 없어
스스로 복을 받는다.

즉, 망망한 대해에
물거품하나가 일어난 것과 같은
‘공생대각중 여해일구발
(空生大覺中 如海一漚發)’
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마음자리는 이와 같이 매우 소중하다.
이자리에서 우리가
이러한 신심으로 일거일동을 하면
한 가지의 조그마한 행동일지라도
한량없는 부처님 마음자리로 통해 버리며,
그 자리가 바로 한량없어서
조그만 행동이 일체 행동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스스로 부처님이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법화경』에서
‘한량없는 복을 받느니라.
바로 부처님이 되어 버리는 것이니라.’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건 내가

견해의 망지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본지풍광(本地風光), 우리의 본래면목,
참모습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여러분이

자신과 신념을 가지고 살면
한량없는 복을 받게 된다.

물론 이것은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똑같은 것이다.

이 부처 마음자리는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자리는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거기에서 자비심이 우러나와
모든 사람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하여
부처님으로 모시는 것이 참으로 불사이고,
이것이 바로
부처님행(行)이라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가정이나 사회의 여러 사람이
다 부처님이기 때문에
거기서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그와 같이
부처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서로 봉사하면
그만 아니냐고 하겠지만
사실은 그렇게 잘 되지 않는 것이 다반사다.

우리는 과거의 업장이 두텁다.
업장이 나를 지배하고 있어서
내 마음을 내 뜻대로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통을 많이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업장을 이기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법당에 와서 부처님 등상불한테
정성껏 염불과 예불을 많이 해야만
우리 업장이 녹아져서
복을 많이 받고
마음대로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문명시대는 욕심이 근본이 되어 버렸다.
또 현대는 산업경제만 발전시키다보니
사람들 마음속에는 욕심만 가득하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근본적인 욕심 위에 이성이 있고,
이성 위에
존중할 참가치가 있는 부처 마음자리가 있다.

그런데 이 훌륭한 것을 잊어버리고
욕망으로만 살기 때문에
요즘과 같이 험악한 세상이 되었으며
‘인류가 전부 파멸을 면하지 못하겠다’며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적인 위기를 해결하려면
부처 마음자리를 믿고,
부처 마음자리에서
과학문명을 다시 창조하고
산업사회를 건설해야만
행복하고 평화적으로 살 수가 있다.

옛날 스님의 법문을 들려 주겠다.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한테 물었다.

“어떠한 것이 부처입니까?”

그러자 조주 스님이

“전리저(殿裏底)니라.
법당 안에 계신 분이니라.”

했다.
그 스님이 다시 물었다.

“법당에 모신 분은
흙으로 만든 등상불이 아닙니까?
나는 참부처를 묻는데
어찌 흙으로 만든 등상불을 말합니까?”

조주 스님이

“아, 그렇다.”

라고 대답하자
그 스님이

“그러면 어떠한 것이 참부처입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조주 스님이 대답했다.

“전리저니라.
법당 안에 모신 분이니라.”


이것은 애들도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실은 이것이 큰 법문이다.

여러분은 어쩌면
법당 안에 있는 부처님이
나무와 흙으로 만든 등상불
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순히 감각적으로만 보면
한갓 등상불에 불과하지만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이
부처 마음자리에서 보면
모든 게 다 부처님 마음자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즉,
‘산은 산대로 부처가 되고
물소리는 부처님 법문소리’
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듯이
한갓 새가 지껄이는 소리도
그냥 새소리가 아닌 것이다.



 십육응신아라한

(十六應身阿羅漢)이라.


오늘 십육 아라한을 조성했다.


일신십유야중비

(一身六也中非)


십육 아라한은 원래
근본 부처 마음자리인 법신 자리의 응신으로
본래면목, 그 깊은 데서 보면
근본 부처 마음자리인 법신자리나
십육 나한이나 둘 다 같다.

금강정체시비외

(金剛正體是非外)라.

우리 금강 정체 본래면목,
본지풍광 참모습 자리에서 보면
시비 밖이라고 했는데,


이 시비라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시비가 아니고
거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작조아명무료시(鵲噪鴉鳴無了時)

저 까치가 지저귀고
또 까마귀가 우는 소리가 마치는 때가 없도다.



이는 본지풍광 차원에서 한 말이라 뜻이 깊다.

이러한 심지법문을 한번 듣기만 해도
한량없는 복을 받고 꼭 성불한다고 한다.

설령, 이러한 법문이
좀 딱딱하고 이해하지 못한다하더라도
이런 좋은 법회가 있어서
인연을 맺기 위해서 한 말씀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구경(究竟)의 궁극은 어떠한 것이냐.


 답착비로정상행
(踏着毘盧頂上行)하고

높이 비로자나 부처님 이마를 밟고 간다.

팔각마반공리주
(八角磨盤空裏走)

여덟 모난 맷돌이
허공에서 자유자재하게 구른다.

포사석녀향료공
(抛梭石女響遼空)하고

돌계집이 베를 짜는데
허공에서 소리가 나는구나.

해저니우야규빈
(海底泥牛夜叫頻)이로다.

바다 밑에서 진흙소가
밤중에 울부짖는 소리가 자꾸 들려온다.


이것이
본지풍광의 차원에서 그대로 한 말입니다.


이것을 한 번 듣고
여러분이 이제 공부하면
한량없는 복을 받고
한량없는 지혜가 나오고 성불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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